중용 원문 해제
중용 원문 해제에 앞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BiBle)을 살펴보려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Now the earth was formless and empty, darkness was over the sur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God saw that the light was good, and he separat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 the first day. ) –
창세기 1장:1-5(Genesis Chapter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without him nothing was made that has been made.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In him was life, and that life was the light of men. )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but the darkness has not understood it. )
요한복음 1장 1-5(John Chapter 1:1-5)
창세기에 대한 풀이가 요한복음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의 신께서는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 곧 Sky가 아니라 힘을 가진 권세자들, 곧 하늘들(Heavens)과 앞으로 인간이 지배할 눈에 보이는 땅을 그의 첫 창조작업으로 이루신다.
'창조이전까지 쿨쿨 주무시던 우리의 존엄지극하신 신께서 느닺없이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 깜깜하여 급히 불을 키셨다. 불을 밝히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어 무지 심심하자 온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가 아니라 창조이전에 창조와 관련한 청사진, 앞으로 창조를 어떻게, 왜, 무슨 목적으로 등등 모든 계획서를 손에 든 신께서 짠 하고 무대에 등장하신 것이다.
이러한 계획이 없었다면 신도 없었을 것이다. 만물이 이 계획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 계획에 따르면 신의 우주 창조 목적이 인간이 신의 아들들이 될 것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첫 째 날의 빛은 태양 빛이 아니다. 태양은 네째 날에 생겨난다.
어둠 또한 태양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들이다. 이 피조물들 가운데 신의 창조목적 선포에 반기를 든 세력을 어둠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신께서 창조 목적을 우주 만방에 선포한 함으로써 앞으로 창조될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이 창조라는 대작업의 최종 수혜자가 될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난리가 난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하늘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자신들을 창조한 신의 능력에 육박하는 능력을 가진 권세자들이 마땅히 자신들이 신의 후계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계의 하찮은 인간들에게 모든 복을 주겠다는 신의 선포에 반역을 도모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용에서는 어떻게 신의 창조목적을 기록하고 있는가.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천(天)은 단순히 하늘이 아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인격체다. 곧 우주만물을 창조한 신이며 하늘님(하나님)으로 불러진다.
중용을 ‘신이 내려 머무는 곳’으로 해석하지 않고는 하늘 천(天), 곧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끌어낼 수가 없다. 유대교의 십계명이 ‘무엇 무엇을 해라. 하지말라.’ 식이데 반하여 중용에서의 신의 명령은 성(性)이며 그 성을 따르는 것을 인간이 마땅히 가야할 도(道)로 보았다.
주희는 성(性)을 이치, 원리라 보았으며 그 이치를 따르는 것을 도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신의 원리를 좇는 학문을 성리학(性理學)이라하며 도학(道學)이라고도 불리워졌다.
성리학과 도학이 지금으로 해석하면 신학(神學)이 되겠으나 수 천년을 두고 신의 개념을 권력자와 그에 기생하는 학자들이 희석시켜 온 까닭에 성리학이 결국 인간 중심의 학문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신에의 접근은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사용한 몇 몇 단어와 문자들을 통해 공자가 전하고자 한 본 뜻을 추적해보려 한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정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 者也.
정성된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알맞게 되며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게 되어 도에 알맞게 되는 것이니 성인(聖人)인 것이다.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선(善)을 가리어 굳게 지키는 것이다.
정성이 신에서 사람으로 둔갑하는 대목이다.
성은 하나님 말씀언(言)과 이룰 성(成)이로 구성돼 있다.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용이라는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비는 것이 기도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주기도문中-
예수가 남긴 기도 또한 우주 만물을 창조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 곧 말씀(言)이 하늘에서 선포되어 이루어졌듯 땅에서도 성취되기를(成) 비는 것이었다. 그것이 중용의 핵심사상으로 정성성(誠)이라는 글자 한자로 대표된다.
길도(道) 또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신의 눈과 신을 향한 손을 가리킨다. 신이 보는 앞에서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 할 것이다.
‘정성되게 한다는 것은 선을 가리어 굳게 지킨다.’는 해석 또한 추상적이다.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내가 기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도록 하는 것이다. 신의 명령, 곧 신탁을 듣는 것이다. 착할 선(善)이란 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 무릎꿇고 신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려 듣는 것이지 내 인간의 욕망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것이 아니다.
…故至誠如神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은 것이다.
誠者, 自成也; 而道, 自道也
정성됨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이루게 하는 것이요, 도는 스스로 가게 하는 것이다.
...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정성이라는 것은 만물의 처음과 끝이요, 정성됨이 아니면 만물은 없다.
정성이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간이 기도하든 안하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길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정성은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셨던 설계도에 따라 창조되고 종말이 있게되다는 것이다. 당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만물도 생길수도 없었고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없어질 것도 없었다.
총 49편 이라는 방대한 저술인 예기(禮記) 속에서 공자가 전하고자 한 핵심은 바로 이 성(誠)이라는 글자다.
살아있는 신께 드리는 '제사에 대한 뜻풀이'한 것이 대학(大學)이라면 그 '제사의 목적' 을 설명한 것이 중용(中庸)이라 하겠다.
제사의 목적은 인간의 욕망을 기도라는 형태로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는 기도하는 것이라고 성(誠)이라는 글자 하나가 설명해주고 있다.
[에필로그]
지인용(知,仁,勇)과 삼위일체(三位一體)
무엇을 지(知)라 하는가
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움을 좋아하는것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까운 것이다.]
신학이 인문학으로 변경되는 대목이다. 배운다는 것은 인간세상의 것을 배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설계도다.
성경에서의 지(知) 또한 하나님 말씀을 입술로 되세기는 것이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Pray also for me, that whenever I open my mouth, words may be given me so that I will fearlessly make known the mystery of the gospel,[NIV]
에베소서 (Ephesians) 6:19
영어 해석을 직역하면 '내가 입을 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어져 나로하여금 담대히 하늘나라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도록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기 바랍니다.'가 되겠다.
단지 음식물을 씹어 넘기는 도구(口)에 지나지 않았던 인간의 입이 하늘의 계획을 선포하는 지극히 소중한 역할로 변모하는 대목이다.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나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苦樂)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怜悧)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스랴.
제석산(帝釋山)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
-김소월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모든 죄악의 발생지인 인간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귀한 입술로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세상 번잡한 일에 사사건건 매달려 악취를 풍겨내던 입술이 간혹 신의 명령에 따라 가끔씩 고상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엄자리같은 입술이 열릴 때마다 눈이 멀고 귀가 멀게할 정도로 홀딱 반하는 진리의 향기를 발하는 입술로 태어나는 것이 지(知), 곧 신을 아는 것이다. 신을 안다는 것은 말씀을 안다는 것이다. 신자라 하면서도 그 입술에서 말씀한줄 나오지 못하는 신자는 가짜 신자다.
목사라는 타이틀로 혹은 스님이라는 명함을 내밀며 세상 번잡한 일에 미주알 고주알 씨부리는 자들은 신을 아는 자들이 아니다. 신을 파는 장사꾼이라고 보는 것이 이들에게사기당하지 않는 길이 되겠다. 지(知)의 고대글자 또한 신과 사람과 하늘과 땅과 해와 구름 등을 그려내고 있다. '누가 세상을 창조한 것을 알다.'라는 뜻을 그린 것이다.
어질 인(仁)은 사랑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설계도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설계도에 따른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 말씀이라는 설계도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지기 전까지는 설계도에 지나지 않는다. 설계도에 따른 구체화, 건설작업이 필수이다.
공자는 그것을 힘써 행한다하여 인(仁)이라 하였다 [力行近乎仁]
인(仁)은 두 사람의 심장이 통하는 것이다. 지금 말로 사랑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 예수로 실체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4)
행한다 함은 사랑이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은 실체로 나타난 사랑이다. 예수가 사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한복음 13:34-35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9
'예수님 사랑합니다.'을 제단 앞에서 목이 쉬어라 외치는 것이 예수의 도를 깨달은 자의 전부가 아니다. 그 열정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이 예수가 전해준 진정한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해도 다 용서하마.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해도 나 예수만 사랑한다고 외치기만 하면 다 천국에 가느니라.'라고 예수는 말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예수님 사랑합니다.'하는 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멀리 하는 것도 바로 이 까닭이다. 성경 어디에도 '나 예수를 사랑하라.'라고 기록돼 있지 않다.
입술로 '예수사랑'을 외치는 사람치고 '그 이웃을 그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 보지 못했다.
용(勇)이란 신과 함께 하는 것
개인의 의지로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 함께하지 않으면 말이다. 아무리 면벽수련 30년을 했다고 해도 홑겉만 입은 비맞은 젖가슴 봉긋한 황진이가 야심한 시각에 사내에게 뛰어들면 그것을 물리칠 인간 땅 위에 없다.
어느 오후 늦잠자다 일어난 다윗왕이 왕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어염집 귀수가 목간을 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다윗 또한 그 한 순간에 맛이 가버리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날랠 용 혹은 용감할 용의 구성은 쓸용(用)과 입구(口)로 되어있다.
쓸용(用)은 신의 하강, 곧 신내림의 장소이다. 그 곳에 살아있는 인간, 곧 구(口)가 접붙는 것이다. 내 생명 속으로 신이 내리는 것이 바로 용(勇)이다. 접신을 의미한다. 현대적 용어로 성령이 함께하는 것이 용(勇)이라는 글자이다.
공자는 '수치를 아는 것이 용이다.'[知恥近乎勇]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신으로 부터 오며 (性)그 성품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바른 길(道)이라고 하였듯이 치(恥)란 마음(心)에서 나는 소리, 곧 양심을 귀(耳)로 듣는 것이다.
말씀을 아는 것(知)의 구체화(仁)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속에 임재하는 것(勇)이 공자가 본 신학이라면 신의 말씀(言)과 그 말씀의 실현된 예수, 그리고 신이 내 속에 임재하는 성령의 상태가 삼위일체의 핵심이 될 것이다.
신의 말씀이 그 입술에서 떠나지 않는가 (知-言)
신의 말씀이 실행되고 있는가(仁-예수)
신의 말씀이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가(勇- 성령)